2025년 다해 4월 15일 화요일 † [자] 성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3,21ㄴ-33.36-38
<같은 날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유다는 끝내 아닌 척하지만, 예수님은 아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기 위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완수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며 자신만만해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인간이 자신만의 힘만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뱀의 욕구를 이겨낼 수 없음을.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예언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유다는 긍정했고, 베드로는 부정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착한 뜻’의 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의지적으로’ 자신에 대한 예언을 부정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는 ‘겸손’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러한 예언을 부정하려 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순응했습니다.
결말은 자살이었습니다.
우리 심판을 위해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안 짓고 가 아닙니다. 의지의 문제입니다.
언젠가는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의지입니다.
이 의지가 무너지면 유다가 되고 무너뜨리지 않으면 베드로가 됩니다.
『서유기』의 주인공 손오공은 본래 화과산에서 태어난 돌원숭이로, 뛰어난 재주와 강력한 힘을 갖췄지만, 동시에 큰 교만과 통제되지 않는 욕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손오공은 천상에서도 말썽을 피워 천계를 뒤흔들었고, 결국 부처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해 오행산 아래 오백 년간 갇히는 벌을 받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삼장법사가 경전을 얻기 위해 인도로 향하는 여정 중 손오공을 해방시킵니다. 손오공은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서역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여정에서 손오공은 수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특히, 그의 본성이 쉽게 분노하고 자만에 빠져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탓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습니다.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손오공이 삼장법사의 오해로 인해 질책 받고 마음에 상처받아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한 사건입니다. 어느 날 손오공은 마귀가 변장한 사람을 알아보고 공격하여 삼장법사를 보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를 본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행동을 오해하여 그가 무고한 생명을 해쳤다고 생각하고 손오공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이 질책에 상처받은 손오공은 스승과 동료들을 떠나 화과산으로 돌아가 홀로 지내게 됩니다.
홀로 있던 손오공은 처음에는 자유와 힘을 누리며 만족스러운 듯 보였지만, 이내 내면의 공허함과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과거의 잘못과 자신이 지켜야 할 동료들, 그리고 스승 삼장법사의 신뢰를 떠올리며 깊은 고민과 갈등 속에 빠집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깨닫습니다.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제멋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제어할 줄 아는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손오공은 마침내 삼장법사와 동료들 곁으로 다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깊은 참회를 합니다. 삼장법사는 그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손오공은 다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삼장법사와의 긴 여정 속에서 손오공이 진정으로 얻은 것은 바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자신을 통제하여 동료들과 조화롭게 지내며, 세상에 선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는 손오공이 원숭이에서 신의 존재로 승화되는 과정이며,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즉, 사람은 많은 실수 속에서도 결국 자신의 교만함과 돈,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존재와 함께 머물러야만 비로소 진정한 성장을 이루고 참다운 인간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둘 다 죄를 지었습니다. 사울은 그 죄를 통해 왕권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를 탐하고 죄를 짓고 뉘우칩니다. 예수님과 동행함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함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는 관계를 위해 돈에 대한 욕심이 있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타협하는 사람에겐 착한 뜻이 없습니다. 착한 뜻과 삼구와는 동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뱀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삼구를 버린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기는 하지만, 조금씩 나아집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함은 바로 내 안의 삼구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마치 오공이 삼장법사와 동행함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제어함을 배우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자캐오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집에 모시려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아니면 돈의 욕심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찾아 고래 입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분과 함께가 아니면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착한 뜻이란 삼구를 없애고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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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