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4월 20일 일요일 † [백] 주님 부활 대축일 복음: 요한 20,1-9
<부활을 전하는 자의 행복>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설움을 느끼며 살던 어떤 영국 어머니는 외아들 ‘티모스 베이커’를 무시 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기자회견 때 티모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이 아이의 어머니는 왜 행복해질 수 없었을까요? 아이에게 부활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어도 사는 완전히 다른 신과 같은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성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사람이 부활을 믿지 못하면 티모스 베이커의 어머니처럼 모기를 키우게 됩니다.
사람이 나빠지는 이유는 다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럽니다. 어차피 죽어도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기에 나빠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활을 믿나요? 부활을 믿으면 어떤 표징이 따를까요? 부활을 전합니다.
이 믿음을 전할 때 내 주위에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예전에 ‘선덕여왕’이란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이란 캐릭터는 악역이었지만, 나름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특히 화랑의 최고 수장으로서 미실은 왕을 폐위시키는 데 화랑들을 이용합니다. 자신이 밀려날 위기에 처하자 미실은 화랑들이 자결하게 만들어 왕을 폐위시킵니다. 자신을 위해 죽어줄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확인합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많은 이들의 증언과 자신들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는 믿게 됩니다.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레나는 점점 부활의 증인들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어미를 잃은 호랑이들을 젖이 나오는 리트리버에게 맡겼습니다.
리트리버는 어미가 없어 두려움에 떠는 새끼 호랑이들의 걱정을 줄여줬습니다.
리트리버의 젖을 먹고 자란 호랑이들은 커서도 리트리버를 어미로 여깁니다.
리트리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리트리버는 개로서 할 수 있는 이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보다도 행복한 개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입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호랑이들을 키웠습니다. 젖을 주는 일은 자기 살과 피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부활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존재일까요?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믿음을 주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물 위를 걷고 죽어도 부활하는 존재라고 가르칩니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돈이나 명예, 먹고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까?
예수는 예수를 낳고 모기는 모기를 낳습니다. 모기를 낳으면 내 주위에는 모기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낳는 이들은 참 행복을 누립니다. 예수를 낳는다는 말은 우리는 죽어도 사는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와 경쟁을 합니다.
나비가 되는 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누에고치를 통과하는 죽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고 죽어봅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 곧 호랑나비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랬더니 자기 주위엔 다른 나비들이 모여듭니다.
애벌레들에게 부활을 선포하지만, 정작 자신은 꽃의 꿀을 먹으며 나비들 사이에서 삽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