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4월 11일 금요일 † [자] 사순 제5주간 복음: 요한 10,31-42
<하느님으로 자처하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인가?>
발레 ‘백조의 호수’는 주인공인 오딜리아(주로 오디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라는 공주가 마법에 의해 백조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마법에 의해 백조의 모습으로 변하고,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오딜리아는 아름답고 착한 성격을 가진 공주지만, 사악한 마법사 로트바르트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는 오딜리아와 그녀의 백조 친구들이 계속해서 백조의 모습으로 살도록 강요합니다.
하지만 오딜리아는 저주를 풀고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마법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진정한 사랑, 즉 프린스 시겔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겔 왕자는 오딜리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녀를 구하려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로트바르트는 시겔 왕자가 오딜리아 대신 오딜리아의 마법에 걸린 형상인 자기 딸인 오디트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왕자는 그녀를 오딜리아라고 착각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저주는 영원히 풀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왕자는 자신이 마법사에게 속았음을 깨닫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딜리아는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자신은 죽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도 그러면 함께 죽자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 사랑으로 마법사는 힘을 잃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둘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오딜리아는 마법에 걸려 자기 본성을 부정하고 낮추며 삽니다.
그러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시도했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둘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오딜리아가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복음 내용을 그대로 비유로 옮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원도 오로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이뤄집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이 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먼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하느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사람이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이 하도 자신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성이 아니라 위격(Persona)입니다. 본성은 하나인데 바로 “신성”입니다.
하느님은 이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위격으로는 셋이지만, 한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본성은 어떻게 나올까요?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믿을 때, 부모처럼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인간의 본성이 나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인간의 본성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던 유다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돌을 맞더라도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일까요?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호랑이 새끼가 어미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요 죄입니다.
우리는 진짜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의 고통도 자신이 백조임을 깨달을 때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본성은 양식을 통해 오는데,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냥 모기 본성에 머무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아무 피나 빨아먹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그 부모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모기가 사람의 살과 피를 먹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도 될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가 신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거부할까요? 죄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원죄의 성향에 그대로 머물며 계속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게 행복입니다. 그러려면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한데, 그 정체성이 성체성사로 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짜 죄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본성을 하느님께 참여시켜야 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살과 피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한번 우리도 하느님이 된다고 생각해 보고,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해봅시다.
하느님으로 자처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으로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물속으로 뛰어든 분이십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