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간 12

2024년 다해 12월 21일 토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21일 토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39-45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조차도> 아기 예수를 잉태한 소녀 마리아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여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루카 복음사가는 한편 거룩하게, 다른 한편 장엄하게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아직 스물도 안 된 처녀 마리아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은 마리아였습니다.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

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21일 토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39-45 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어제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

2024년 다해 12월 20일 금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20일 금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26-38 마리아는 부단히 성찰했고 또한 순종했습니다!> 수태고지 복음을 천천히 묵상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하시고 총애하신 이유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보낸 메시지 앞에 그녀가 보인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몹시 놀라워하면서도 천사의 인사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생각도 개념도 없는 철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렸지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 앞에 나름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신비 앞에서 나름 이해하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의구심을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2024년 12월 20일 금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20일 금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26-38 믿음의 사람은 속세 사람들과 이렇게 구분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의 깊은 순간을 듣게 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시리라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합니다.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셨습니다.하지만 마리아도 인간적으로 “이게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품으셨을 것입니다. 천사는 그녀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그녀의 친척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이야기를 전하며,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아 아들을 배었으니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 불리던 이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

2024년 다해 12월 19일 목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9일 목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5-25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힘을 포기할 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외침을 통해 평생에 걸쳐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두 노인이 겪었던 고통과 수모가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복음 1장 25절) 사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의롭고 흠 없는 사람들, 성덕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즈카르야는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였고, 엘리사벳 역시 첫 대사제인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사제는 사제의 딸과 결혼해야 했었기에, 사제 즈카르야는 사제 가문의 ..

2024년 12월 19일 목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9일 목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루카 1,5-25 자녀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기대한 대로 된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선지자가 그에게서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합니다. 그것을 믿었다가 아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창피만 당할 것입니다. 그가 평생 청해온 것이면서 믿지 못하고 청했던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시간이 지나 보면 알 것을 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

2024년 다해 12월 18일 수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8일 수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마태오 1,18-24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탄생하실 아기의 이름 두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원자시다.’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모세의 후계자로서 요르단 강 건너 약속된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여호수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후 파괴된 이스라엘 성전과 의식을 재건하는데 앞장섰던 대사제 ..

2024년 12월 18일 수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8일 수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마태오 1,18-24 내가 받는 은총의 수준은 내가 하는 사랑의 수준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자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남몰래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요셉은 임신시켜놓고 약혼자를 버린 몹쓸 인간으로 낙인찍힙니다.죽이지 않으면 죽는 이 결단의 순간에서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마리아를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이 은총을 얻어냅니다.요셉은 성모님의 남편이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사랑만이 은총을 얻어냅니다. 인간의 사랑을 지향하는 아기는 인간의 사랑을 받지만, 늑대 정도의 사랑을 지향하는 늑대 새끼는..

2024년 다해 12월 17일 화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7일 화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마태오 1,1-17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 몇 년에 한 번씩 꼭 전화를 걸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뿌리 찾기 협회’인지 뭔지 하는 단체인데,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다시 잘 정리된 족보가 새롭게 출간되었으니,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꼭 한 권 사달라며 골백번도 더 전화를 거십니다. 요즘은 족보, 하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과거에 어르신들께서는 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선친께서 두툼한 족보 책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면 뛰쳐나오면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족보였습니다. 그다음이 집문서요 땅문서였습니다. ..

2024년 12월 17일 화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2024년 다해 12월 17일 화요일 † [자] 대림 제3주간  복음: 마태오 1,1-17 왜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 줄 알면서도 어떤 날은 다른 행복을 추구할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그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 분명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예언된 태어남과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그 예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가 없으셨기 때문일까요?그 예언이 행복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